설 교 말 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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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하나님 없는 사사로움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. 유대교와 친족들 마져도 사사로움에 빠져 예수님을 미쳤다 합니다.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친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불러내고, 그에 반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.
1. “우리는 예수의 직계가족입니다.” (31)
-‘그 때에’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.(31) 왜 사람 살리는 일에 열심인 예수님을 불러내는 것일까요? 사사로운 관계, 그로인한 염려 때문일 것입니다.
-원래대로라면 찾아오지도, 불러내지도 말아야 합니다. 예수님은 더 이상 자신들의 사사로운 염려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. 그럼에도 저들이 예수님을 불러내는 것은 아직도 사사롭게 예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.
3. “예수님의 가족들이 지금 밖에 찾아왔습니다.” (32)
-‘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습니다.’ 무리들의 변하지 않은 사사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. 이 때쯤 되면 예수님에게서 속죄양 메시야 되심을 보고, 사사로운 가족들에게 “예수님은 더 이상 당신들의 사사로운 가족이 아닙니다.” “예수님은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던 속죄양 메시야”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.
-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. 첫째, 예수님이 속죄양 메시야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때문이고, 둘째,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으로서 날 때부터 세상구원을 위해 사적인 존재가 아닌 공적인 존재로 태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.
3. ‘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?’(33)
-이 얼마나 냉정하고 단호한 반응입니까?(눅2:49) 왜입니까? 사사로움이 세상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. 육신의 부모, 형제자매를 우습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. 하나님창조의 시선, 십자가구원의 시선으로 보라는 말입니다.
-교회는 죄 된 사사로움을 극복하는 곳입니다.(행2장) 사사로움을 단호히 거절하는 곳이 교회입니다. 사울(삼상) 과 아나니아, 삽비라 사건(행5장)이 좋은 예입니다. 교회는 사사로움을 넘어야 합니다.
4. ‘여기 둘러앉은 사람들이 내 어머니, 내 동생들이 아니냐?’(34)
-두 부류의 예수님 가족이 있습니다. 첫째, 현실적 필요만 충족하는 사람들인데 위험한 사람들입니다, 둘째,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왔지만 예수님 통해 현실의 문제를 넘어, 죄 문제와 사사로움의 문제를 본 사람들입니다.
-셋째, 죄로 인한 사사로움의 폐해를 알고 예수님께 나온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입니다. 모든 것 뒤로 하고 세상을 살리는 공적인 삶을 훈련받고 있습니다.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. 당신은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?
5. ‘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부모, 내형제자매이다’(35)
-세상에 많은 명문가문이 있습니다. 그러나 예수님의 가문보다 더 좋은 가문은 없습니다. 누가 이 가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? “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”입니다. 많은 모델들이 있지만 두 모델만 소개합니다.
-첫 번째, 제자가 된 갈릴리 사람들입니다. 죄와 사사로움을 폐해를 알고 예수님이 부르실 때 주저하지 않고 쫒았던 사람들입니다.(막1:14~20) 두 번째,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입니다. 죄와 사사로움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본 사람들입니다. 구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“본토, 친척, 아비집을 떠나라 하십니다. 주저치 않고 떠납니다.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. 부르실 때 사사로웠던 삶을 과감히 접었습니다. 공적인 삶의 지평을 열기위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. 말씀을 쫒았고, 예수님을 쫒았습니다.
*- 사사로움을 넘어서 공적인 지평을 활짝 연 저들의 삶은 어디에서든지 복음의 향기가 되었습니다. 저들이 가는 곳 마다 예수바람이 불었고, 저들이 머무는 곳 마다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. 거듭남의 역사, 치유와 회복의 역사, 그로인한 예수님 닮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.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. 사사로움을 넘어 공적지평이 열린 결과입니다.